real minority
동전의 비유를 들며 삶에는 적지 않은 양면성이 있다고 합니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삶에는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이 있고, 선이 있으려면 악이 있어야 하고, 선이 있기에 악이 있다는 주장 그렇게 틀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한 인생에도 그와 같이 비중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선과 악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경중의 여지가 있을 것임에도 보다 중요한 것을 재어 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인류가 그렇지 않음이 혼재하여도 계속 좋은 방향의 발전을 지향하는 이유입니다.
삶 가운데 좋지 않음의 존재 가능성에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를 두둔해선 곤란합니다. 그런 존재가 있음을 알고 알맞게 관계를 제어함을 가르쳐야 함이 진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언젠가는 옳은 길로 들어서기를 바래야 함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와 함께.
사실과 진실과 진리에 대한 구별이 필요함은 전한바 있습니다. 사실로는 선과 악의 공존 모습과 진실은 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며, 진리는 참된 진리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신 가르침인 성경에 근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본을 전하고 가르쳐도 삶 가운데 적지 않은 미혹에 드는데, 제대로 전하지 조차 않고 접할 기회가 없었다면 어떠하겠는가 가늠해 봐야 합니다.
악의 존재 가능성에도 선을 지향해야 함은 성경의 일관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소수자라고 여기는 당상애자 등의 얘기도 성경에 오래 전부터 나옵니다. 그들을 악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여러 변수가 있음에도, 이는 악인도 실제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적지 않은 뛰어난 인물이 존재함과 그들 간에는 우애가 있음과 같은 선상입니다.
뛰어나거나 그렇지 않거나 등과 연계해도 되는 모습이 있고, 그렇지 않은 모습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뛰어난 재능 여부를 넘어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을 다루어봐야 그것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대체로 그렇게 어렵지 않게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 악한 부모가 실제 해도 일반화는 곤란하기에, 자신의 자녀에게 권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가로 쉽지만 핵심의 접근으로 구별 가능합니다.
그들의 존재 가능성에도 이를 옳다고 자녀에게 전수함은 선이라고 보이진 않습니다. 이미 언급해본 바와 같이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며 존재하는 선과 함께 악한 본능에 대해 이를 옳다고 하면 결국 악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악을 포장한다고 해도 악은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좋지 않은 부모가 존재할 수 있음에도, 일반화해선 곤란하며 참된 부모와 선생은 그 자녀와 학생에게 옳은 길을 안내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선함이 유지되어 왔음을 간과해선 곤란합니다.
freedom is not free 라는 얘기와 같이 좋은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장하면서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노예와 같은 삶에 이르러 깨닳음 보다는, 일찍이 깨닳음이 좋기에 옳은 교육의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는 실제 체험이 부재한 인생들이 이론으로 이런 저런 이상을 얘기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이 그와 같습니다. 이론적 학문이 존재함에도 대체로 삶은 실체입니다.
참과 거짓이 혼재하는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유인데 선과 악은 그렇게 나뉘어 갑니다. 선이 증가하는 모습의 결국은 점차 좋아질 것이며 그 반대는 당연히 반대가 될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없지 않을 것이며, 단기간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전하신 바와 같이, 회개는 언제나 가능해도 너무 많은 이들을 악에 물들게 한 이후에 하는 회개의 유효기간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와 과연 그렇게 합당한가 의문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자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발전하는 세상에 선택 선별하여 DNA 가공이 가능하다는 세대에, 특정 성향을 증대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고 이를 옳다고만 한다면 세상은 참된 다양성을 넘어 결국 파괴를 행해 치달을 가능성을 높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지 않음은 적절히 제어되어야 함은 역사의 교훈이며 실체인 것입니다.
과한 잘못의 반복을 꾸짖지 아니하는 부모는 참된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악에 속하거나 조정을 당하고 있는 무식하거나 어리석은 존재인 것입니다. 과한 잘못의 반복을 적절히 꾸짖지 아니하는 선생은 참된 선생이 아니며 참된 친구가 아니며 다만 형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자신의 입만을 위해 사는 그저 그런 존재인 것이며 아부 아첨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꾸짖음을 넘어 좋은 길로 잘 인도해 주어야 좋을 것입니다.
진정한 소수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옳은 안내의 인도함을 얻지 못해 그간 적지 않은 잘못에 들어 고생 가운데 있는 인생은 아닌가 싶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못하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가정, 학교, 사회 등 서 당성애, 폭력 등 잘못된 가치관에 근거하는 가르침을 배우고 옳은 줄 알고 죄 아래 있었던, 그럼에도 그 심경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진정한 소수자이지 않을까요.
가해자인데 피해자라고, 인권을 중히 여긴다며 도리어 가해자를 양산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습입니다.
진정한 악인인 누구일까요.
모르지 않은데 악행을 지지하고 전하는 자일 것입니다. 옳음과 그름 자체를 진정 잘 구별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도 같은 선상일 수 있습니다. 피해 당사자의 고통에 둔감해선 곤란합니다. 물론 좋지 않은 인생도 때로 피해 대상자에 놓일 수 있으며, 이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만 본문의 진정함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상대적인 관점이 있기에 인권에도 등급이 있다고 여깁니다. 도리어 문제는 이런 상대성과 등급을 간과함에 근간한다고 여깁니다.
성경에 그 잘못을 행하는 바 놔두라고 하심도 결국 적지 않게 나무래 봤음에도 소용이 없기에 그냥 놔두라는 체념에 근간함을 가늠해 봅니다. 결국 망해 본 이후에 깨닳는 인생이기에, 그런데 도를 넘은 세대가 있어 보입니다. 그냥 놔둠을 넘어 적극적으로 옳다고 제도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하는 어느 물질의 위협보다 이런 물질을 다루는 존재가 더 위험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아가 근래 지구 온난화라는 이슈의 사실임에도 이를 이용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다른 모습에도 있듯이 모든 것을 온난화 이슈에 묻어 넘어가려는 억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 내에서도 그러하며, 항상 더 잘 아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인 된 인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없을 것이며 죄인을 긍휼과 불쌍히 여김에도, 죄를 불쌍히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혼자 망함을 넘어 함께 망하자는 것을 좋게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누군가 옳은 길을 가려는 자체를 막는 사람일 것입니다. 교훈으로서의 가능성이 아닌 보복의 심경으로 자신이 겪은 좋지 않음을 누군가도 겪어야 돼 라고 하기에 그는 참 부모가 아닌 가짜 나쁜 부모 선생 이웃 등이며 악을 교묘하게 감춘 존재인 것입니다.
대개 겉으로 보기에 대번에 좋지 않은 사람으로 분별되는 경우는 대개는 해당 분야의 하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악인은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악인 것입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의 상징가운데 주로부터 결국 버림받는 교회와 같은 존재가 그런 부류일 것으로 가늠해 보게 됩니다. 교회 같은데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반드시 이루어 질 일이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 또한 주의해야 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성경의 재앙 부분의 예고에도, 그러므로 자신이 그 일을 이루는 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 라는 오만과 착각과 편견에 있지는 않는지 살핌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구약의 예고에도 피조물인 인생은 과연 굳은 심령으로 답습만이 참된 것인가에 대하여, 신약의 등장은 항시와 모든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님을 일깨우심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를 정확히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안다고 자부함에는 유의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천동설 지동설 등 과거의 논쟁과 그 결과의 한 예와 같이 나아가 오늘날과 앞으로도, 성경에는 여러 여백이라는 공간이 존재한다고 가늠해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삶에 있어 경제가 적지 않게 중요하며 나아가 무엇에 대항하지 말라는 등의 격언의 회자됨을 아는데, 과연 성경의 말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에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함이 함께 하는 삶 가운데,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중요한 무언가를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행하지 않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는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Jun 2023